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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서 온 편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 1년을 지내며(12)
-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까지


글 김형호 미카엘 신부 |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선교사목

 

신발 두 켤레: 5월 19일

두 개의 신발, 나의 신발과 그의 신발은 같은 듯 다르다. 회색의 내 신은 3년 반 전 함께 일하던 직장동료와 할인매장에 구경 갔다가 그가 선물로 준 것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회식을 마치고 소화도 시킬 겸 식당 근처에 있던 매장에 들렀는데 아마도 내가 사 달라고 졸랐던 것 같다. 한화 2,000원이었다. 연둣빛, 중아공 친구의 신발은 다 떨어진 슬리퍼를 한동안 끌고 다니다 3개월 반 전, 새 신을 샀다며 자랑하던 신발이다. 1,000세파프랑을 주었다고 말한 것 같다.

 

 친구의 신발은 3개월 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떨어졌고, 내 신발은 3년 반이나 되었는데 떨어지지 않았다. 가격은 환율대비 거의 비슷한데 출처를 보니 내 신은 중국산이고 친구의 신발은 카메룬산이다. 결코 내 신발의 재질이 훨씬 튼튼한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의 신발은 벌써 떨어졌고 나의 신발은 여태 멀쩡하다. 차이가 있다면 내 신은 특정화된 실내화이고 그의 신발은 유일한 전천후 신발이다. 힘든 일도 하지 않고 방과 책상을 오가거나 기껏해야 마당 산책 때 가끔 신는 것과 온갖 거친 일들과 출·퇴근길 땅의 거침을 감당해낸 신발의 차이다. 뒤축이 다 닳았음에도 그의 신발은 한동안 그와 함께 동행할 것이다. 멀쩡한 내 신발은 언젠가 싫증나면 슬그머니 버려질지도 모른다. 그는 한 짝의 슬리퍼가 신발의 전부이지만 나에겐 운동화와 구두, 외출용 튼튼한 가죽 슬리퍼가 더 있다. 이곳에 오지 못한 신발들도 한국의 어느 창고에 보관되어 있다. 비가 올 때 운동할 때 실내·외를 구분하는 신발들은 조금도 해지지 않았다. 그

러고 보니 자주 맨발로 다니던 그를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사제관을 찾는 적잖은 사람들이 신발을 벗고 두 계단을 올라온다. 그 맨발이 존경하는 땅을 나는 신발을 신고 양말도 신고 막 다닌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먹거리 얘기를 했는데 뇌리에 남은 말이 있다. 월급일이 10일이나 남았는데 ‘돈과 고조(주식)가 바닥났다.’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 그에게 떨어진 신발의 교체는 결코 우선순위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다.

 

부화: 6월 19일

주일미사 때 봉헌되는 닭이 있다. 보통 한두 마리가 봉헌되는데 이 닭들은 며칠간 사제관 마당에서 다소 자유롭게 뛰놀다가 함께 사는 사제들의 먹거리가 된다. 시한부 인생, 그 안에서도 며칠의 여유를 즐기는 닭들을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 몰골은 팔려오는 긴 여정에서 먹지 못해 말라있고 털도 많이 빠져 있다. 몇 달 전에는 아주 큰 수탉 한 마리가 봉헌되었다. 이 닭은 아직 식탁에 오르지 않고 새벽마다 큰 소리로 울며 매주 한두 마리씩 새로이 봉헌되는 암탉을 거느린다. 그 틈으로 암탉 한 마리가 부화를 시켰다. 여태 달걀을 낳는 닭을 보지 못했는데 21일간 생존을 뚫고 어린 병아리 한 마리를 부화시켰다.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엄마를 따라 다니는 병아리가 무척 건강하고 행복해 보인다. 덩달아 엄마인 암탉도 없는 먹거리를 찾아 다니느라 분주하며 기쁘다. 이제 병아리가 조금 더 크게 되면 암탉은 사제들의 식탁에 오를 것이다. 작은 병아리는 적어도 먹거리로 클 때까지는 사제관 마당을 다소 자유롭게 뛰어 다닐 것이다. 먹이를 찾아 분주하게 이곳저곳을 헤매겠지만 불가능할 것 같은 열악한 환경과 죽음의 위협 속에서 소중한 생명을 잉태한 암탉과 병아리의 모습은 이곳 사람들을 많이도 닮아 있다.

 

성화 유니폼: 6월 22일

한때 유니폼을 맞춰 입는 유행이 있었다. 큼지막하게 글씨를 새기고 같은 색, 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었다. 이렇게 생긴 유니폼들은 한 번 또는 몇 번 입고는 옷장 깊숙한 곳에 쌓였다. 이곳 사람들도 각 나라에서 만들어진 다양한 유니폼을 입는다. 대부분의 의류들이 구호품으로 넘어와 일부는 무료로 전달되고 일부는 누군가의 욕심 탓에 소소한 가격으로 시장에서 거래된다. 의류가 풍부한 나라에서 적잖게 건네지는 양질의 의류들로 인해 저개발 국가의 의류 산업이 발전하지 못한다는 말도 있다. 의류시장(기술)의 불모지임에도 불구하고 이곳 사람들은 염료로 인쇄한 원단을 사서 옷을 맞춰 입는다. 여자들은 원피스나 투피스 스타일의 긴치마와 블라우스, 남자들은 바지와 와이셔츠를 맞춘다. 색상을 맞추어서 ‘시리끼(Siriki)’라는 머릿수건도 함께 맞추는 여자들은 디자인도 조금씩 곁들여 가며 나름 멋을 부린다.

   적지 않은 크리스찬들도 예수님, 성모님, 성인들, 성경 말씀들이 새겨진 성화옷감으로 유니폼을 맞춰 입는다. 나름 열심하다는 교우들은 한두 벌씩 다 입고 다닌다. 주일미사 때 단체별로 입고 있는 모습은 나름 거룩하다. 우리 본당의 바오로회, 성심회, 성모회, 사회복지회 이런 단체들 역시 각자 고유의 미션에 맞는 옷을 맞춘다. 그런데 더 큰 고마움은 단체들이 옷을 맞출 때 가난한 주머니를 털면서도 십시일반으로 사제들의 옷까지 함께 맞추어 선물을 하며 그 거룩한 유니폼들을 축복 받아 입는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긴 성화 와이셔츠가 벌써 네 벌이다. 가끔 아침나절, 성당 마당에 입고 나가면 사람들이 진짜 배아프리카(Be-Afrika,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의 자기나라 이름) 사람 같다고 인사말을 건넨다. ‘예수님 거룩한 변모’ 와이셔츠, ‘프란치스코 교황님’ 와이셔츠, ‘주님, 감사합니다’ 와이셔츠… 옷들이 너무 거룩해서 입기 쑥스러운데 이들은 너무 자랑스럽게 유니폼을 예복으로 입는다. 세탁을 하면 진한 염료가 그대로 빠지고 몇 번 더 세탁하면 디자인도 흐릿해지지만 이들은 나름 다림질도 해서 깔끔하게 입고 다닌다. 유니폼을 성화나 말씀으로 변화시켜 예복으로 입는 모습들이 참 멋지다. 갑자기 어딘가에 쌓여 있을 내 몸을 거쳐 간 유니폼들이 생각난다. 그렇게 옷장에 있다가 헌옷 나눔으로 떠돌다가 이곳에서 다시 태어나 누군가에게 입혀질 옷들이 원래의 주인을 찾은 듯, 진득이 생을 다할 때까지 입혀진다.

 

상고어 사전: 6월 23일

상고어는 중앙아프리카공화국과 콩고민주공화국의 국경을 따라 흐르는 우방기 강을 따라 상업을 하던 사람들이 쓰던 언어였다. 19세기 말 이곳이 프랑스 식민지를 통해 수많은 부족들이 하나의 나라로 태동될 무렵 프랑스어가 공식 언어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할 무렵 초대 대통령 보간다(Boganda, 1945~1959)는 부족마다 다른 언어를 상고어로 통일시켰다. 그러나 상고어(Sango)는 생활 언어였기 때문에 문자로 쓰이지 않았고 다양한 신조어나 학문 용어들을 담아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지금은 문자로 쓰이고 합성어를 통해 신조어들을 만들고 있지만 원래 단순한 생활 언어였기에 중아공 사람들은 상고어에다 쉬운 프랑스어 단어들을 끌어와서 사용한다. 그러니 상고어를 쓰고는 있지만 문맹률은 80%가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상고어 사전 또한 오래 전에 선교사가 만든 프랑스어로 쓰인 사전이 유일한 데다, 몇몇 선교사들만 사용했을 터이니 활용되지 못하고 사라진 고서적이 되었다. 이를 어렵게 재(在)프랑스 한국인과 그 배우자(프랑스인 교수)의 도움으로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상고어를 공부하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곳에 사는 외국인들 대부분은 프랑스어로 소통하기에 상고어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는다. 몇몇 외국인 선교사들만 거의 독학으로 고생하며 배우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 2012년 9월 이곳에 선교 소임을 온 남종우(그레고리오) 신부님이 ‘상고어-한국어 문법과 관용표현 모음’, ‘상고어-한어 성경’, ‘상고어-불어-한국어 사전’ 작업을 손수하셨다. 하루에 거의 10시간씩, 3년 간의 작업이었다. 그동안 내전이 3년간 계속되었으니 역설적으로 내전으로 인해 이런 작업에 더 매진 할 수 있었다. ‘삶-죽음’이 순간의 운명이 될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서…. 그리고 며칠 전, 그 오랜 인고의 작업을 끝내고 ‘상고어-불어-한국어 사전’ 출시 기념을 했다. USB에 담아서 건네주는 작은 전달식이었지만 너무나 감사했다. 그러고 보니 지난해 오늘, 내가 이곳에 온 그 날 ‘상고어-한국어 문법과 관용표현 묶음’과 ‘상고어-한국어 성경’을 건네며 해주신 말이 기억난다. “전쟁 통에 진짜 죽도록 만들었으니 열심히 공부하거라.”

앞선 작업들은 직접 볼 수 없었으나 내가 이곳에 온 이후 시작한 사전 작업은 어떻게 준비했는지 지켜 볼 수 있었다. 더위와 모기와 전투하면서 총소리가 빗발치는 내전의 살벌한 상황 속에서 두 달 간 말라리아를 심하게 앓으며 거의 20kg 가까이 살이 빠지는 극도의 고통 속에서 작업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런 사전을 작은 USB에 담아 건네주시며 또 말한다. “죽도록 만들었으니 열심히 공부하거라.” 눈물겹게 고맙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이곳에서 살아갈 한국인 모두에게 너무너무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상고어-불어-한국어 사전’은 이렇게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지난 1년: 2016년 6월 30일

1년의 시간이 흘렀다. 2015년 6월 23일부터 2016년 6월 23일! 그저 예전의 선교사들이 살았던 그 삶을 아주 조금만 흉내 내보겠다고 막무가내 시작했던, 대선배들에 비하면 참으로 편하고 안전하게 문명의 이기들을 누려가면서, 떠나온 곳과의 소통도 하며 큰 어려움 없이 살았다. “선교사가 뭐 이래?” 싶었다. 여태 살았던 삶과 비교하면 불편함이 적지 않았지만, 아주 어린 시절의 환경으로 돌아온 느낌이었지만, 앞선 선배들에 비하면 밥 먹듯 쉬운 일이었으리라. 굳이 발전을 말하자면 새로운 언어를 조금 말하게 되었고 생소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법을 약간 터득했다는 것이다. 앞으로 닥칠 일들을 생각하면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일 뿐이지만 엄마의 품에 있는 아이가 앞일을 미리 걱정하지 않듯 그날그날 살아갈 힘을 주실 거라 믿고, 내일을 걸으며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조금은 두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와 마찬가지로 가야 할 당위는 충분하다. 앞서 걸어간 이들이 있고 또 따라 걸어올 이들이 있다는 것이 내게는 큰 힘이 된다. 지난 1년, 낯설었지만 큰 축복이었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 “선교지에서 온 편지-중앙아프리카공화국” 연재는 이번 호로 끝맺습니다. 그동안 좋은 글 보내주신 김형호 신부님과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